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문단 편집) == 생애와 죽음 == [[실레시아|슐레지엔]] 지방 [[브레슬라우]][* 현 [[폴란드]] [[브로츠와프]].] 근교에서 [[귀족]]([[남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되자 다른 프로이센 귀족 아이들처럼 소년 [[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사 교육을 받게 된다.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황실 육군학교에 입학하여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된다. 황실 제1기병대의 [[육군]] [[기병]]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으나 그 시대에는 이미 기병의 황혼을 가져온 [[기관총]]이 대세였다. 기병장교로서 리히트호펜은 끔찍한 참호전을 경험하였다. 동부전선에 배치됐지만 곧 부대가 전멸, 기병으로 전장에 참전했는데 [[보급병|식료품만 나르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하면서 [[병과]]전환을 신청, 항공장교로 전과해 [[정찰기]] 승무원으로 배치됐다. 처음에는 정찰기 뒷좌석의 후방기총으로 적 항공기를 잡아보고는, 삘 받아서 전투기 조종사를 지원한다. 이때 [[뵐케의 금언]]으로 유명한 [[오스발트 뵐케]]의 광팬이 되었는데, 마침 뵐케는 기존의 정찰이나 폭격 임무는 배제하고 순수하게 제공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새로운 비행대 야스타 11을 창설하려고 하고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우연히 뵐케를 만나 여기에 발탁되어 격전이 벌어지던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킬수를 쌓아올렸고 뵐케 사후에는 우수한 항공부대 지휘관으로 복무, 국민적인 영웅이 되어 자서전도 출판할 정도로 명성을 쌓는다. 이 자서전은 초창기의 공중전에 대해 리히트호펜 본인이 간소하게나마 이론을 정립해 놓은 책으로, 당시에는 물론 이후에도 전세계 전투기 조종사들의 필독서가 된다. 2차 세계대전 에이스들 상당수가 이 책을 읽고 하늘의 길을 택했다는 후문이 있다. 독일이 하늘과 지상에서 모두 한계에 달했던 1918년 봄, 평소처럼 출격했다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출격 전에 엽서에 싸인해 달라고 부탁한 정비사한테 [[사망 플래그|"혹시 내가 안 돌아올까봐 걱정돼서 그래요?" 라는 장난스러운 질문을 날렸다]]고 한다. 리히트호펜은 기체 피격에 의한 추락사가 아닌 총상으로 사망했다. 리히트호펜은 총에 맞고 의식불명이 되어 전투기와 함께 추락 직전까지 갔으나 다시 깨어나 평지에 착륙한다. 그리고 몇 분 뒤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비행기와 함께 추락해 형체도 남지 않았던 다른 조종사에 비해 깔끔하게(?)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비행기는 거의 멀쩡했던지라 기념품 사냥꾼들이 부품을 다 뜯어갔다고 한다.[* 디스커버리 채널 자료를 인용한 영문위키 기록에 의하면 비행기를 발견한 호주군 4사단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는데, 당시 첫 목격자 중 하나인 의무병 Ted Smout 하사의 증언에 따르면 발견 당시 붉은 남작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곧 kaputt(독일어로 "망가진" 이라는 뜻)이 포함된 문장을 남기고 바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외 나머지 단어는 독일어라서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Smout 하사는 붉은 남작의 장화와 철십자 훈장을 가져갈까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기체가 조각나서 사라져 버린 탓에 리히트호펜을 격추시킨 것이 누군지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워낙에 리히트호펜이 유명하다 보니 [[미 육군]] 및 영국 육군 에이스들이 서로들 자신이 격추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국과 미국 언론은 죽은 붉은 남작만 더 유명해진다고 이들을 비아냥거렸다. 영국 육군에서는 최종적으로 [[캐나다]] 출신의 에이스 '''로이 브라운'''이 리히트호펜을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대전 당시에는 확실하게 누구인지 확정되지 못한 채로 되려 붉은 남작만 더 유명해지고 정작 리히트호펜과 마지막으로 교전했던 이들은 대부분 묻혔다. 훗날 시신을 다시 파내 부검한 결과, 적기에게 격추된 것이 아니라 대공 기관총탄이 아래에서 위로 관통한 것이 사인임이 밝혀졌다. 영문위키에 따르면 당시 지상에 있던 병력들은 호주군 4사단이었는데, 붉은 남작의 비행기를 보고 [[루이스 경기관총]], [[빅커스 기관총]], 심지어 [[리-엔필드]]까지 동원하여 전력으로 대공사격을 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위의 무기들이 전부 .303 브리티시 탄을 썼기 때문에 누가 쏜 대공 기관총탄에 맞은 건지 모르게 되었다. 다만 Geoffrey Miller라는 의사와(1998년) 2004년 영국 Channel 4에서 방영한 A Secret History 시리즈의 부검 결과에 따르면 붉은 남작이 총탄에 맞은 방향 등을 고려해 볼 때, 붉은 남작의 사망에 결정타를 먹인 사람은 경험 많은 대공 기관총 사수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Cedric_Popkin|세드릭 폽킨]] 하사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로 붉은 남작이 우측에서 날아온 탄환에 맞았는데, 당시 우측에서 쏜 유일한 기관총 사수가[* 나머지는 리-엔필드 사격이었을 것이다.] 폽킨이었기 때문이다. [[파일: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붉은 납작.png|width=300]] 전쟁 당시 리히트호펜의 인지도는 전선의 군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아이돌]] 수준이었다. 금발의 미남이라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며, 모든 독일 국민들이 리히트호펜의 사인을 받고 싶어했다. 1925년에 리히트호펜의 유해가 독일로 돌아왔는데 전국에 조기가 게양됐고 장례 행렬 뒤로는 베를린이 생긴 이래 가장 긴 줄이 만들어졌다. 리히트호펜이 베를린 군인묘지에 묻힐 때 첫 삽을 뜬 사람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었다. 되려 리히트호펜을 격추시켰다는 로이 브라운(1893~1944)은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살아 생전 자신이 붉은 남작을 격추했다고 자랑했지만 자국인 캐나다와 영국에서 조차 별로 믿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1차대전 말기에는 병에 걸리거나 공중전 도중 부상을 당해 치료받기도 하면서 격추 수가 적은 탓에[* 로이 브라운도 10회의 공중전 승리를 기록한 에이스 조종사기는 하다.] "저런 이가 붉은 남작, 그 괴물을 격추했다고?" 라며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못 미더워했던 걸 본인도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죽하면 리히트호펜을 위해 엄청난 장례식이 치러졌단 걸 전해듣고 "그 놈은 죽어서 전설이 되었지만 나는 살아서 잊힌 지 오래이다." 라고 한탄했던 바 있다. 30대 초반 일찍 군을 예편하여 회계사무원으로 벌어먹으며 살아가다가 작은 항공업체 간부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2차대전이 터지자 징집연령을 훨씬 넘긴 나이로 공군에 지원했지만 나이가 많다고(46) 거부[* 1차 대전 이후 군에 남은 또래 인물들은 이미 별을 달거나 그 직전까지 가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그룹 지휘관을 본다면 13그룹 지휘관 리처드 사울: 1891년생, 11그룹 지휘관 [[키스 파크]]와 12그룹 지휘관 [[트래퍼드 리맬러리]] : 1892년생, 10그룹 지휘관 퀸틴 브랜드 : 1893년생이다. 로이 브라운보다 1~2살 많은 이들이 공군 소장까지 진급한 상태였으니 1894년생 인물들이 무난히 진급했다면 대령~준장 정도까지 진급했을 것이다.]당한 그는 1941년 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은둔하여 시골 농장에서 지내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훨씬 지나서 2010년대에서야 고향에서 에이스라며 재평가도 하고 기념비라든지 여러가지로 알리고 있지만 고향을 떠나면 여전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http://www.koreait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165|오히려 1차대전 2번째 에이스인 캐나다인 빌리 비숍이 리히트호펜을 격추시켰다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빌리 비숍은 격추 수가 72대였으며 중장 계급까지 오른 유명인이다. 캐나다에서 역사교육 중 1차대전때 꼭 가르치는 인물이며 그의 이름을 딴 공항도 있다. 오죽하면 [[동맹국]]에 레드 바론이 있으면 [[협상국]]에는 빌리 비숍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빌리 비숍 토론토 시티 공항]]은 이사람 이름을 딴것. 다만 빌리 비숍이 격추 현장에 있었는지는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Billy_Bishop|빌리 비숍의 활약을 서술한 영문위키]] 기록을 인용하면 빌리 비숍이 1917년 4월 30일에 붉은 남작과 그의 비행대 야스타 11과 조우했고, 그들과의 대결에서 생환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붉은 남작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고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사실상 무승부이므로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nfred_von_Richthofen#Death|붉은 남작의 사망]] 때 그와 싸웠던 조종사 둘은 위에 언급한 로이 브라운과 그의 친구인 [[https://en.wikipedia.org/wiki/Wop_May|윌프리드"웝" 메이]] 대위라고 언급되어 있다. 처음에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도그파이팅을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 초보 파일럿이었던 메이 대위는 위에서 빙빙 돌며 관전하다가 (역시 초보자라 같은 짓을 하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을 노리고 공격했다.[* 사실 볼프람이란 걸 알고 노린 것은 아니고, 볼프람이(초짜니깐, 만프레트의 명령으로) 위로 빠져서 관전하는 것을 보고 같은 초짜라고 판단해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사촌동생인 볼프람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붉은 남작이 싸움에 끼어들어 볼프람은 무사히 도주했다. 이에 메이는 도주하고 붉은 남작이 뒤를 쫓는 와중에 이를 보고 메이의 친구였던 로이 브라운이 합세했고, (아마 붉은 남작에게 결정타였을) 호주군 4사단까지 대공사격으로 가세하여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